인생도 사업도 어차피 가시밭길
“고민하면 길이 보입니다” 문성원색 김국진 대표
‘불황’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 인쇄업계 종사자들은 이 끝나지 않을 듯 보이는 힘겨운 시간의 공간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문성원색 김국진 대표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한명의 인쇄인이다.
다만 어둠속에서도 빛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낙관적인 리더이자 내실을 다지며 내일을 준비하는 준비된 리더이기도 하다.
1981년부터 시작된 인쇄의 인생길에서 그가 닦아온 불황탈출의 노하우는 무엇인지 확인해 보자.
취재 | 임성윤 기자(printingtrend@gmail.com)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험난하지 않을 때가 있나요? 인쇄업계가 힘들다고 해도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인생과 마찬가지에요. 불경기라지만 그 안에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는 다 존재하는 겁니다. 문제는 내일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문성원색의 김국진 대표는 연매출 7~8억원 규모의 기업을 10여년만에 100억원 수준의 강소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위기라는 시기에 냉철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으로 공격적인 포지션을 유지했고 이를 계기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던 문성원색을 탄탄한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다른 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군데씩 문을 닫을 시기에 오히려 적극적인 영업과 과감한 시설투자를 단행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논리를 현실화 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원들의 불만이 있을 법도 한 경영방식이었지만 인쇄업에 발을 들인 뒤부터 쌓아온 직원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 융합력을 자산으로 성공을 이끌었다. 그 결과가 연매출 100억원, 자본금 28억5,000만원의 우수중소기업이다. 이제 문성원색이라는 기업의 이름은 국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쇄업계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들어선 인쇄인의 길
그러나 어느새 느껴버린 인쇄의 매력
김국진 대표는 소위 베이비붐 세대인 58년 개띠 생이다. 부친이 1971년 문성원색을 창립했고 김 대표는 1982년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반 강제적으로 문성원색에 입사했다. 대학의 전공이나 관심사 등은 고려하지 않은 부친의 강압 아닌 강요가 있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김 대표 역시 후계자 수업이나 차기 사장, 경영권 승계 등은 전혀 관심 밖이었기에 부친의 입사권유를 따른 입사이기도 했다.
현재와 같이 취업난이 심각한 시대였다면 금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사장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문성원색은 규모가 작은 인쇄소에 불과했기에 큰 포부를 세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천직이라서였을까? 김 대표는 공장에서 돌아가는 인쇄기계들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한해 한해가 지날수록 인쇄인이 돼가는 자신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무 및 영업직으로 시작한 사회의 첫 걸음이었으나 김 대표의 관심은 공장에 더욱 쏠려있었다. 용지와 잉크가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창작물이 탄생하는 것은 흥미를 자극시키는 요소였다. 인쇄기의 부속 하나하가 각기 제 역할을 하고 이들이 조화를 이뤄야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 전 과정을 총괄하는 것 역시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배운 기술들을 바탕으로 김 대표는 인쇄소의 일을 일일이 체크했으며, 문성원색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밤샘작업을 하는 직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은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 해뜨기 직전이에요. 그때는 비몽사몽간이 지속됩니다. 오히려 해가 뜨고 난 이후 시간에는 더 괜찮아 지는 경우도 있어요”
인원이 부족할 때는 자신이 직접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장이 되고 문성원색을 탄탄한 기업으로 만들어 놓은 지금도 직원들의 고충과 고민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이유는 이 같은 현장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사장의 아들’ 및 ‘차기 사장 후보’라는 조건은 자칫 주홍글씨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익힌 인쇄기술과 직원들과 형성한 유대감이 김 대표를 문성원색에 자연스레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현재도 김 대표는 직원들의 출퇴근이나 일일 매출과 같은 세부적인 사안들은 크게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일에도 흐름이 있고 기복이 있는데 하루하루의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직원들에게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경영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쌓아온 기업가정신
‘신뢰’는 김국진 대표가 대표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 바탕이다. 김 대표의 부친은 북한 출신으로 ‘빌린 돈은 빚을 내서라도 갚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김국진 대표가 사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5년, 거래처의 파산으로 연쇄 부도위기를 겪은 일이 있었다. 당시 문성원색은 DVD의 자켓이나 타이틀을 인쇄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비디오 및 DVD 대여점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되면서 거래업체는 문을 닫았고 문성원색 역시 4억원 상당의 어음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연 매출 7~8억원 수준의 문성원색에게 4억원의 부담은 경영자체를 위협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입지를 쌓아온 문성원색에게 거래처들은 따뜻한 손길을 내 주었다. 종이 도매상들은 자사의 자금으로 종이가격을선 결제 해 주었고 거래 은행 역시 추가 대출을 해 주는 등 문성원색이 재기 할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줬다. IMF 사태가 발생하기 전이라는 측면도 있으나 그동안 김 대표의 부친이 쌓아온 신용이 동반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재기한 김국진 대표는 문성원색의 1997년 매출을 기존의 두 배인 14억까지 끌어 올렸다.
인생은 타이밍? 인생은 실전!!
IMF금융위기가 오기 전인 1997년 초, 김국진 대표는 본격적인 성장세를 만들어가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수출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하이델 5색 기계를 도입하기로 결정 한 것. 라벨인쇄를 위한 결정이었고 해외수주 물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문제는 금액. 하이델 5색 인쇄기의 가격은 무려 16억원, 문성원색의 매출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연 매출보다 더 비싼 가격이었다.
김 대표는 백방으로 뛰었다. 1금융권에서는 자금 대출이 힘들었고 신용장을 발행하는 데에도 부담스러워했다. 신용보증기금에서도 매번 대출을 거절 받다가 인쇄 계약서 및 향후 사업계획서를 수차례 제출하고 나서야 4억원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고 리스사, 은행 등을 돌아다니며 겨우 구입 자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국진 대표는 ‘운이 좋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구입 조건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하이델 5색 기계를 구입하면서 김 대표는 2년간의 지불유예 조건을 관철 시켰다. 구입대금을 2년뒤인 1997년에 지불해도 되는 파격대우다. 그 동안에 발생하는 이자 역시 하이델사에서 전액 부담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혜택이었고 이후에도 사례가 없는 조건이었다. 여기까지는 영업력이라 할 수 있다. 운이 작용한 것은 그 이후부터다.
1995년 5색 인쇄기를 도입할 당시 독일의 통화는 마르크화였다. 환율은 650원, 하지만 2년 지급유예를 받은 1997년 당시의 환율은 무려 430원까지 하락했다. 여유자금이 생길 때마다 마르크화를 사 모으던 김 대표는 최종적으로 계산해 보니 환차익으로만 5,000만원 이상 이득을 본 것을 확인했다.
또 하나는 라벨인쇄물 수출이 좌절 됐음에도 오히려 국내 시장이 활성화 됐다는 것이다. 하이델 기계의 도입은 해외 라벨 인쇄 물량이 증가 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첫 거래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계약은 무산 됐다. 위기랄 수 있었으나 국내에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기존거래 선이던 롯데호텔의 인쇄물을 참고하던 롯데 백화점이 백화점 쿠폰북과 전단들을 5색인쇄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 5색 인쇄가 활성화 되지 않았던 당시 문성원색의 5색 인쇄는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상품이 됐고 이후 승승장구하는 발판이 됐다.
내가 먼저 믿어야 비로소 쌓이는 ‘신뢰’
문성원색의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회사를 자신의 보금자리라 여기고 있다. 여기에는 김국진 대표의 남다른 노력이 존재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모이는 조찬모입에서 입버릇처럼 나오는 화두가 인력관리다. 이들 대부분은 세계적인 기업을 이끌어가는 존재들이지만 ‘일이 힘든가, 사람이 힘든가?’ 의 질문에는 늘 ‘사람이 힘들다.’는 대답을 건넨다. 그만큼 직원들의 관리는 경영자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김국진 대표 역시 3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하는 경영자다. 인력관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어려움을 김 대표는 신뢰로 풀어나가고 있다. 먼저 믿고 먼저 다가서는 것. 이 것이 김대표가 선택한 인력관리의 비법이다. “직원들에게 회사를 내 집같이 여겨달라고 말하고 내 회사 인 것처럼 행동하라 말하지만 이는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회사가 먼저 회사의 주인이 사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해 줘야 하죠.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 사원들의 마음입니다.” 김국진 대표는 영업사원들에게 모두 차량을 제공해 줬다. 렌트 비용도 회사가 부담한다. 유류비 등 교통비도 물론 지급한다. 회사가 사원을 대접해준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또한 어려운 경영환경에서 여유자금이라도 생기면 이벤트성 보너스까지 지급하고 있다. 정기적인 보너스는 아니지만 적은 금액이라도 갑작스런 용돈이 생기면 그것이 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일매출상황이나 일일성과를 크게 체크하지 않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정기적인 보고는 있어야겠지만 하루하루 성적표를 받아들게 한다면 스트레스로 오히려 직원들의 업무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출근을 늦게 하는 직원이 있더라도 탓하지 않는다. 전날 야근을 했거나 잔업을 해결하기 위해 근무를 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불신을 갖기 시작하면 믿고 싶지 않은 것만 보입니다. 거꾸로 믿기 시작하면 사장이 나를 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원들 스스로 느끼게 되죠. 업무성과도 더욱 좋아집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영자가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있어요. 말은 쉽지만 행동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실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던 사무실이나 문성원색 근처 까페에서도 김국진 대표는 사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사원들 역시 김 대표에게 자연스레 다가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커피 값을 대신 내주기 위한 대화였으나 경영자와 사원 사이에 격의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격 경쟁력을 갖는 것, 이것이 무기
김국진 대표가 신용과 믿음으로서 내실을 다졌다면 문성원색의 외형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커가고 있다. 문성원색의 강점은 클라이언트의 요구 그 이상을 만족시키는 아이디어를 역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인쇄업은 업종의 특성상 고객의 감동을 끌어내기 힘들다. 고객이 원하는 그대로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 최상의 결과라 통용된다. 하지만 문성원색은 고객의 의견에 더해 한 단계 더 발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만족도를 끌어 올린다. 인테리어의 색감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가상형성필름 인쇄가 대표적이다.
최근 유행했던 3D모델링 인테리어 기법은 소비자가 원하는 재질의 가구들을 배치했을 때 어떠한 느낌이 나는지 컴퓨터 화면을 통해 확인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문성원색은 인쇄업 특성에 맞게 다채로운 재질의 원자재 샘플을 필름인화지를 통해 대조해 볼 수 있는 샘플북을 제작했다. 또한 벽지샘플북의 경우 한 장 한 장 넘겨봐야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펼쳤을 경우 계단식으로 배열되는 샘플북을 만들어 좋은 평가를 이끌어 냈다. 의뢰했던 고객들이 만족과 감동을 넘어 고마움을 표현한 것은 물론이다.
김 대표는 고객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고민하는 단계를 만들어냄으로서 사세를 확장시켰고 ‘문성원색에 가면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는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다. 가격 절감은 고객에게는 중요한 과제다. 같은 제품일 경우 수량을 무기로 혹은 매출을 무기로 낮은 단가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디어가 수반된다면 가격 결정원은 인쇄소가 갖게 된다. 김국진 대표는 “각 제품에 맞는 인쇄 아이디어를 창조하고 역으로 제안해 좋은 평가를 이끌어 냈을 경우 가격의 결정권은 누가 갖게 될까요? 당연히 인쇄소가 우위에 설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인쇄소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충분한 고민과 집중도 높은 성찰을 펼친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인쇄소가 모바일 연구소 개설 이유는?
과감한 결단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사세를 성장시킨 김국진 대표는 앞으로도 고민과 성찰을 늦출 생각이 없다. 멈춰진 듯 보이는 인쇄업계의 현실에서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 일환이 디자인 연구소 엠플러스와 모바일연구소의 개설이다.
인쇄디자인이야 이해가 간다고 쳐도 인쇄소가 모바일연구소를 개설했다는 점에서는 의아한 부분이다. 인쇄업체가 스마트폰을 연구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김국진 대표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디지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도전이라는 것.
“종이인쇄로 대변되는 고전 인쇄는 물량은 줄어들지라도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최근 아날로그가 다시 각광을 받는 것처럼 옛스러움으로의 귀소본능이 종이 인쇄의 수명을 증가시킬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새로움을 찾지 않으면 종이로의 회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바일 연구소는 그 일환으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변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설했습니다.”
문성인쇄의 모바일 연구소는 디지털시대의 디지털과 종이인쇄의 접합점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아직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은 개념이지만 이를 찾아내는 것이 주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표가 현실화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연구소의 이름을 모바일 연구소로 잡은 것 역시 디지털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모바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거는 ‘운’이 절반, 그러나 미래는 ‘준비’
첫 부도위기는 부친이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넘겼다고는 해도 연 매출의 두 배에 가까운 5색 인쇄기 도입의 실현, 이를 통한 성장 동력의 확보, 지속적인 아이디어 창출, 등을 과연 운 덕분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직원들에게 받고 있는 높은 신뢰 역시 오랜 기간 솔선수범 해온 노력의 결과인 것처럼 오랜 시간 지속적인 정보수집과 고민이 수반된 결정체가 현재의 문성원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업체에 문성원색의 사례를 무조건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상황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각기 다른 경영철학과 조건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똑같은 전략이나 선택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이 앞으로의 시대이기도 하다.
“어렵다 어렵다 말만하면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시대가 그렇기 때문이에요. 예전에는 단편기술 하나만으로도 사업을 해나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복합기술을 가져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요. 복합적인 기술을 확보하려면그만큼 고민을 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희망을 가져야 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에는 철저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김국진 대표가 문성원색을 이끌어온 가치이자 앞으로 유지해 나갈 정신이라 하겠다.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미래라지만 대비하는 자세를 유지하면 길은 분명 보일 것이라는 입장이다. 김국진 대표는 마지막 멘트에서도 긍정적인 자세와 그에 걸맞는 책임감을 잃지 않았다.
“물론 2차 밴더나 3차 밴더 등 영세한 업체들은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인쇄업계 중에서 가장 힘든 곳은 윤전이에요. 새로운 기술이 들어갈 시스템 적 분야가 없으니까요. 해야 하는 것은 1차밴더 업체들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개발해서 2차 밴더 업체들에게 기술을 전달해 주고 먹거리를 창출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성원색 역시 그렇게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출처 월간PT>
※ 출처 : EngNews (산업포탈 여기에) - “고민하면 길이 보입니다” 문성원색 김국진 대표'산업뉴스 > 기업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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